본문 바로가기
유니버설 플래닝 스튜디오 저마다
Blog 목록

[저마다] 다른 몸에 익숙해지기

키움런 참가자 인터뷰를 하며

날짜

많은 동화들이 선악의 구도를 나누어, 동화를 읽는 아이들이 착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의도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엄지손가락 두께보다 두껍고 그림이 아닌 글자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명확히 나눠지지 않는 인물들이 하나둘 등장하는데도 저는 '주인공이면 착한 사람, 주인공 반대편의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리디아포에트의 법 주요 인물 다섯명(마리아나, 야코보, 리디아, 엔리코, 테레사)

넷플릭스의 이탈리아 드라마 <리디아 포에트의 법>은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변호사 리디아 포에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리디아는 여성의 가입이 금지되어 있던 이탈리아 법호사 협회 가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진취적 인물인 반면, 리디아의 오빠의 아내 테레사는 그 시절 부유층의 순종적인 여성상에 부합하는 인물입니다. 가정에서 변호사인 남편을 성실하게 내조하는 인물이지요. 테레사는 자신의 남편을 늘 난처하게 만드는 리디아가 못마땅하죠.

테레사는 처음에는 리디아를 탐탁지 않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만, 사건을 해결해내는 리디아를 보며 이 감정은 궁금증으로 변화합니다. 나중에는 리디아의 방종도 눈감아주고, 남편 앞에서 리디아 편을 들기도 하며, 은은한 조력자가 됩니다. 회차를 거듭하며 집안일로만 국한되어 있던 테레사의 관심사는 리디아의 법조계 진출을 위한 법안을 궁금해하는 등, 그 주제가 바깥으로 확장됩니다.

얼마 전 무의에서 주최하는 ‘키움런’ 스태프로 참가하며 참가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키움런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기부 러닝 대회예요.

인터뷰이 중 비장애인, 특히 평소에 장애를 가진 사람과 접점이 없었던 사람들은 키움런 참여 소감을 전하며 ‘감동’이나 ‘뭉클’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었어요. 사실 장애인 참가자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고 참가하진 않았을 거예요. 본인이 자신의 새로운 기록에 감동하고 싶었을진 몰라도요. 그저 달리고 싶었겠지요.

반면 또 다른 분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근데 나보다 빨리 달리는 분들이 많아서 나중엔 별생각 없이 '나나 잘 달리자' 하고 그냥 달렸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분의 코멘트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실제로 아주 지쳐 계셨거든요. ㅎㅎ

그리고 또 다른 분은 **“시각장애인 러너가 앞에 달릴 때, ‘왼/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라고 외쳐야 한다는 것을 이제까지 몰랐다. 키움런을 통해 시각장애인 러너와 함께 달릴 때의 에티켓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도 꼭 외치겠다.”**라고 하셨어요. 딱 한 번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죠.

세상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두에서 맞서는 리디아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먹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저는 리디아보다 테레사라는 캐릭터에 더 마음이 갑니다. 리디아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라면, 테레사는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때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보다, 자신이 완고하게 갖고 있던 생각을 바꾸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번 키움런의 인터뷰 참가자들 역시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조금이나마 변화하기로 결심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현장에서 느낀 감정이 뭉클함이든, 존경이든, 혹은 경쟁심이든 상관없습니다. 함께하는 경험을 통해 무관심이 관심으로 바뀌었고, 일상 속에서 이제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이제부터는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0에서 1로,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한단계씩 변화한다는 생각을 해요. 0에서 10으로 변화하는 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없는 한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양한 장소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면, 이 경험 자체가 0에서 1로 변화하는 그 첫 시작을 돕는다고 믿습니다.

테레사는 시즌3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결혼과 육아로 그만두었던 교사 일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습니다. 세상엔 자신만의 속도로 변화할 줄 아는 더 많은 테레사가 필요합니다.

ps. 바쁘다는 핑계로 뉴스레터 발행을 하루 하루 미루다보니 미루는게 점점 쉬워지더라고요. 깊이 반성하고 착실할 발행인이 다시 한번 되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